양보운전의 필요성

운전을 하다보면, 낄 수 있을 때만 깜빡이를 키는 사람이 많다.
그럴거면 방향지시등이 왜 필요할까?

양보를 해달라고 표시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양보운전의 필요성”을 알리고 싶다. 운전의 매너를 알리고 싶다.

2년간 서울시내 운전을 하다보니, 피곤할 때 자주 양보를 부탁하는 깜빡이를 키곤 한다.
세상은 통계에 수렴한다고 할만 하다.

절반에 가까운 훌륭한 인품의 운전자들이 양보를 해주신다.

운전 문화에 대한 병신같은 문화가 존재한다.

끼어들기를 하려면, 끼어드는 의도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깜빡이를 키면 가속을 해서 못끼어들게 덤벼든다.

한국 사회가 가진 사고의 방향성에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

나에게 가속하는 바쁜 사람들을 바라보지 말고,
나에게 양보해주는 다수의 훌륭한 사람들을 바라봐라.

꾸준히 참고 양보를 요청하는 깜빡이를 넣다보면 알 수 있다.
양보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깜빡이를 키면, 절반정도는 가속하고 절반정도는 양보를 한다.

양보를 계속 요정해보고 받아보니까 많이 다르더라.

나는 자주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하는 경우를 많이봤다.
그리고 그들은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절대 믿지 않으며,
자신이 공평하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공평하고 합리적이면, 통계적으로도 공평해야 한다.
공평하게 반반의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항상 내가 원하는 선택과 반대되는 선택을 해야한다.
그렇게 해도 내가 가진 본질적인 성향 때문에 절반의 통계를 가진 경험을 할까말까 하다.

그런 경험의 확장에 대한 방향성 때문에라도,

양보를 안하는 사람은 양보에 대한 경험이 확장되지 않는다

양보를 요청해보니까 양보의 미덕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양보를 안해준다는 적대의식이 가득한 운전을 하던 과거와는 다른 생각이다.

경험의 확장의 한계에 대한 규칙이 있어서,
치명적인 경험 확장의 한계에 의해서, 양보를 안하는 사람은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양보를 하지 않게 되어있다.

그들은 양보에 대한 경험이 확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양보만 한다고 생각하고 운전해도,

통계적인 자아는 반반을 지향 할 것이다.

양보운전 절반 / 이기적인 가속 절반

걱정하지말고 양보하라

끝(내라 얌채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