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결혼을 하는 후배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그리고 가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주는 이야기 이다.
이정도 사람이면 됐어.
내가 이런 걸로 따지면 사랑이 아니야.
사랑하니까 원래 이정도는 참고 사는거잖아.
하지만 잘 생각해봐라
“오직 너만 주인공”이라고 말해준다.
뾰족한 돌이 들어간 신발을 24시간 신고 걸어다닐 수 있어?
“어. 나는 그런 것 쯤은 참을 수 있어. 그런 것은 사랑 앞에 아무것도 아니야”
법륜스님도 생사가 따로 없다라고 하셨었지만, 그 말은 물고문과 같은 현실적인 고통 앞에서 부서졌다고 하셨지.
말은 쉽지. 머리 속의 상상에서 현실로 넘어오면 그런 말은 가짜가 되기 쉽다.
아예 그런 부분을 보는 눈이 없어서, 영원히 거슬리지 않을 경우.
아니면 지금은 그렇지만 나중에는 거슬리게 되는 경우.
이 두가지 경우는 정말 구분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갈림길이 될 것이야.
어른들이 보기 싫다고 하셨던 부분들은 분명 너도 나이가 먹으면서 거슬려할 내용일 수 있어.
그리고 그정도 조언을 무시할 정도의 결정이라면 책임지고 짊어지고 살아야 해.
그런 불확실한 부분 말고 현실로 돌아와서
설령 불편함을 참거나 견디면서 산다고 치자.
(영원히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건 드물다. 그리고 그런 경우는 문제가 안되니 넘어간다.)
상대방은 무슨 죄를 지어서, 참고 견뎌가는 너를 보면서 살아야 하나?
너는 그럼 상대방이 불편하거나 불쾌해하는 것을 24시간 보면서 살 수 있어?
지속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짜증이 나면,
어느 순간 그 짜증은 증폭되고
사소한 반응에도 표현되는 증오로 변질되지.
사람도 사람인지라
‘정’도 있고, 인지상정이라는 말처럼 이겨내고 더 좋은 미래를 위해서 서로 노력할 것이지만,
한번 뿐인 인생을 왜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냐?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하는 것을 버릇처럼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
최선을 선택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겂이나서?
그동안 자신에게 최선이라는 결과를 마주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이야기가 멀리 돌아가게 되겠지만,
지금 생각하고 있는 최선이 정말 최선이 맞는지 확인해봤어?
지금 생각하고 있는 최선이 정말 최선이 맞는지는 선택해보고 가봐야 아는게 맞아.
그런데 먼저 산 사람, 깨달은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 들과 소통하고 자기 자신을 깊게 되돌아보면 최선을 알게되지.
최선을 확인하는 것을 인생을 걸고 하지마라.
인생을 건 선택은
항상 5년 10년 또는 평생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