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부서지기 쉽다.

나는 사랑을 하는가. 사랑은 부서지기 쉽다.
사랑은 둘간의 믿음과 신뢰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연결되어있지 않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성장통을 겪으며 삶을 쌓아올리고 있다.
나 또한 나름대로의 고통과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자아 위에서
삶과 가치관이 쌓여져왔다.

나는 “나의 정신적 삐뚤어짐” 위에서 쌓여왔다.

여러가지 고통과 원망 미움으로 점철된 나의 삶은
아버지의 패배주의 매너리즘위에
주변인들의 비하와 깔봄을 주로 채택하며 투쟁하는 삶을 쌓았다.

돌아보면 착한 사람들은 나를 주변에서 아껴주고 지켜주었었다. 나의 본심은 착하다며, 안아주신 수 많은 주변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비하와 깔봄을 채택하고 쌓고, 그것을 이기기 위한 몸부림을 치며 40평생을 살아왔다.

고통만 채택하는 나의 선택은
어느순간 너무 큰 고통의 적층위에서, 작은 고통도 큰 고통으로 바꿔버렸다.

매 순간의 고통이 하나하나가 너무 컸다. 그래서 나를 끊임없이 사랑해준 동반자조차 찌르고 있었다.
사랑조차 무책임하게 너무 쉽게 포기하고 놓아버리는 마음이 자주 들었다.

서로 행복하지 못하게 찌른다면, 놓아주는 것이 맞으리라.
이 고통을 더이상 지속적으로 느끼고 견딜 수 없으리라.

감정적인 적층과 깨달음으로 나의 현실을 마주한다.

내가 포기하고 내가 떠오르는 못난 감정그대로 계속 표현하다간,
정말로 이사랑이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느순간 들었다.
그런 감정은 이 사랑의 끝을 느끼고 마주하게 만들었다.

심장이 내려않고, 피가 꺼꾸로 솟았다.
나는 그런 마음이었다.
나는 동반자의 사랑이 표현의 미숙함보다 큼을 느낄 수 있었다.

동반자의 사랑에 감사할 수 있었고, 내가 무책임한 면모를 깨닫고 반성할 수 있었다.

내 감정과 내 표현이 일치하지 않을 때 오는 정신적 괴리의 고통을 핑게로
내 삐뚤어진 감정을 아끼는 못난 모습이었다.

무책임하지 않은 나는 무엇인가

책임지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감정적인 부정성, 올바르지 않은 감정에 충실한 것은 무책임한 것이었다.

내 부정적인 모습을 내가 추구하지 않는데도 감정에 충실해야한다며
그것을 방조하고 방관하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고 조그만한가. 소인배가 바로 나다.

소인배는 내가 꿈꾸던 내가 아니다.

남을 깔보던 나의 가치관

바람을 피웠다고 상대를 원망하고 버리는 사랑이 사랑이냐며 비웃었었다.
깔봤다.
조건부 사랑은 그냥 조건부 메카니즘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단편적인 생각으로 하는 것이 사랑이더냐

살면서 헤이해진 어느순간, 나도 고통의 앞에서 쓰면 뱉고자 하지 않았는가.
그런 비하를 내뱉은 나 자신은 더욱더 크게 부끄럽고 미안하지 아니한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서로를 사랑하고 지키는 큰 마음과 책임감

서로가 사랑을 시작했던 마음 그대로를 지키고 잊지않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사랑이다.